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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눈부시게 화려하기만 하면, 극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잊어도 괜찮은가? 글루크의 무대는 이 물음에 정면으로 아니라고 답한다. 오르페오가 아내를 두 번째로 잃고 부르는 「에우리디체 없이 나는 어쩌란 말인가」를 들어보면, 놀라운 것은 그 선율에 아무 장식이 없다는 사실이다. 슬픔인데도 밝은 조성에 얹혀 있고, 목을 꺾는 기교도 같은 자리를 되풀이하며 뽐내는 대목도 없다. 대신 노래가 숨을 고르는 자리마다 오케스트라가 끊기지 않고 흘러들어와, 무대에 빈 공백을 남기지 않는다. 그의 소리를 이루는 것은 이 벌거벗음이며, 덜어낼수록 감정이 도리어 또렷해진다는 역설이다.
귀족의 숲을 돌보던 산지기의 아들로 태어나 프라하에서 공부한 그는, 한 후원자의 손에 이끌려 밀라노로 가 오페라 작법을 익혔고, 여러 도시를 떠돌며 이탈리아식 오페라 세리아를 스무 편 넘게 찍어냈다. 흥행에는 성공했으나 서로 갈아 끼워도 표가 나지 않을 작품들이었으니, 훗날 그가 손수 부수려 든 바로 그 양식이었다. 균열은 빈에서 시인 칼차비지를 만나며 벌어진다. 이미 마흔여덟이 된 1762년, 두 사람은 오르페오를 무대에 올리며 자신이 반평생 성공시켜 온 관습에 등을 돌린다. 칼차비지는 훗날, 자신은 재료를, 원한다면 혼돈을 건넸을 뿐이며 그 창조의 영예는 둘의 몫이라 적었다.
그가 세운 문법은 1769년 알체스테 악보에 붙인 서문에 단단히 박혀 있다. 음악을 제자리로 돌려놓아 시에 봉사하게 하고, 극을 끊거나 군더더기 장식으로 그 긴장을 무르게 하지 말 것. 말은 단순해도 무대의 오랜 관습을 통째로 갈아엎는 요구였다. 그는 가수가 같은 대목을 되풀이하며 목청을 자랑하던 다카포 아리아를 없앴고, 하프시코드가 건조하게 읊조리다 아리아로 넘어가던 이음매를 지워, 오케스트라가 처음부터 끝까지 극을 떠받치게 했다. 서곡마저 몸풀기이길 그만두고 극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이피제니 앙 토리드에서 고요하던 도입부는 곧장 폭풍우로 번져, 막이 채 오르기도 전에 관객을 사건 한복판에 세운다.
처음 들어설 자리는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다. 「에우리디체 없이」의 꾸밈없는 선율과, 파리 개정판에 더해진 「축복받은 혼령들의 춤」의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플루트 독주로, 왜 덜어낸 소리가 더 깊이 베는지 확인해 보라. 가디너가 몬테베르디 합창단과 시대악기로 담은 녹음이 그 결을 들려준다. 다음은 이피제니 앙 토리드다. 오레스트가 「내 마음에 평온이 돌아온다」고 노래하는 순간, 비올라들이 쉼 없이 같은 음을 두드리며 그의 거짓말을 들춘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제 어머니를 죽였으니 — 한 비평가에게 글루크가 그렇게 답했다고 전해진다. 말 대신 오케스트라가 진실을 발설하는 이 장면은 민코프스키와 레 뮈지시앵 뒤 루브르의 녹음으로 들어보라. 여력이 남으면 알체스테의 「스틱스의 신들이여」로 그가 벼려낸 비극의 무게를 재어보아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