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로우하면 프랑수아 쿠프랭의 공연이 캘린더에 모이고, 새 일정이 등록되면 알려드립니다.
클라브생의 현은 뜯는 순간 이미 죽기 시작한다. 건반을 눌러도 소리를 부풀릴 수 없고, 손끝에 힘을 더한들 한 음을 길게 붙들 방법이 없다. 발현되자마자 사그라드는 이 악기의 숙명을 두고, 쿠프랭은 평생 그 꺼짐을 감추는 기술을 다듬었다. 잔음(아그레망)이 음 하나하나를 감싸고, 화음은 통째로 누르는 대신 아래에서 위로 한 알씩 풀어 흩뿌린다. 이미 사라진 소리의 자리를 잔향의 환영이 대신 채운다. 그의 소품이 늘 무언가를 속삭이다 말끝을 흐리는 듯 들리는 까닭이 여기 있다. 크게 선언하는 대신, 사라지기 직전의 여운만을 손끝으로 붙든다.
그는 코렐리의 소나타에 매혹됐지만, 당대 프랑스의 귀는 이탈리아 취향에 완고했다. 그래서 자신이 쓴 첫 트리오 소나타를 이탈리아식으로 철자를 바꾼 가짜 이름 아래 내놓고, 사르데냐 궁정에 있는 친척이 신진 이탈리아 작곡가의 곡을 보내왔노라 둘러댔다고 전해진다. 갈채가 쏟아지자 비로소 자기 이름으로 나아갔다. 이 작은 속임수가 드러낸 균열 — 물려받은 궁정 춤곡과 장식의 세계, 그리고 탐냈던 이탈리아 노래의 긴 선율 사이의 틈 — 은 그의 필생의 과제가 된다. 두 취향의 화해(les goûts réunis). 말년에는 통풍과 흐려지는 시력이 그를 건반에서 떼어냈고, 생제르베 성당의 오르간 자리는 사촌에게, 왕실 클라브생 주자의 세습권은 딸 마르그리트안투아네트에게 넘겨야 했다.
그의 문법에서 장식은 덧칠이 아니다. 클라브생 연주법을 다룬 그의 저술은 잔음 하나하나의 자리와 모양을 정확히 규정하며, 연주자가 마음대로 빼거나 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트릴과 모르덴트는 음의 곁다리가 아니라 음의 정체성 그 자체다. 곡의 제목마저 춤곡 이름 대신 '벌들' '수확하는 사람들' '작은 풍차들' '돌풍' 같은 초상과 정경으로 붙였다. 추상적 형식이 아니라 손바닥만 한 인물화이자 풍경화. 짝이 어긋나게 흔들리는 리듬(노트 이네갈)과 류트에서 빌려온 흩뿌리는 주법, 되풀이되는 후렴(롱도)이 그 위를 흐른다. 무엇 하나 소리 높여 외치지 않는다. 절제된 애수, 반쯤 가린 감정 — 드러냄이 아니라 머금음이 그의 미학이다.
입구는 '신비한 바리케이드'(6번 오르드르)가 좋다. 아무도 제목을 풀지 못한 3분짜리 론도로, 두 손이 한 자리에 묶인 채 짜내는 흩음의 직조가 최면처럼 이어진다 — 꺼짐을 감추는 그의 기술이 가장 투명하게 들리는 자리다. 다음은 '두 취향의 화해'에 실린 '코렐리 예찬'. 프랑스 춤과 이탈리아 소나타를 한 무대에 세워, 화해라는 그의 기획을 문자 그대로 상연한다. 마지막은 '테네브레의 독서'. 두 소프라노가 통주저음 위로 히브리 글자를 길게 늘여 노래하는, 그의 가장 서늘하고 깊은 곳이다. 클라브생 소품은 크리스토프 루세, 실내악 '왕실 콘서트'는 조르디 사발과 르 콩세르 데 나시옹, '테네브레의 독서'는 루세의 레 탈랑 리리크나 윌리엄 크리스티의 레 자르 플로리상 녹음이 믿을 만하다.
조건에 맞는 다가오는 공연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