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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음악에서는 어느 목소리도 반주로 물러서지 않는다. 오른손이 노래하는 동안 왼손도 제 노래를 부르고, 그 아래 낮은 선율마저 따로 살아 움직인다. 서너 개의 선율이 한꺼번에 흐르는데 어느 하나 장식으로 깔린 것이 아니어서, 듣는 사람은 어느 줄을 따라가야 할지 정하지 못한 채 전체에 붙들린다. 그런데도 이 여러 목소리는 부딪히기는커녕 매 순간 하나의 화음으로 맞물린다. 저마다 자유로운데 동시에 빈틈없이 짜여 있다는 이 모순이 그의 소리가 지닌 정체다.
스무 살 무렵 그는 한 달 휴가를 얻어 북쪽의 대가 북스테후데의 오르간을 들으러 떠났고, 걸어서 수백 킬로미터를 오간 끝에 넉 달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자리를 오래 비운 그를 교회 당국이 불러 세워 어디를 다녀왔는지 추궁한 기록이 남아 있다. 평생 교회와 궁정의 성실한 고용인으로 산 이력 안에서, 이 무모한 도보 여행은 그가 음악을 얼마나 굶주리듯 삼켰는지를 드러낸다. 한참 뒤 쾨텐에서 일하던 시절에는, 영주를 수행해 온천에 다녀온 사이 아내가 급작스레 숨져 이미 땅에 묻힌 뒤였다는 사실을 돌아와서야 알았다. 슬픔조차 흐트러뜨리지 않고 반듯한 틀 안에 담아내는 그 절제가 어디서 왔는지, 이런 대목에서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아, 이 사람이구나' 싶은 순간은 대개 이렇게 찾아온다. 짧은 한 마디가 한 목소리로 홀로 제시되면, 곧 다른 목소리가 같은 마디를 그대로 받아 부르며 끼어들고, 먼저 나온 목소리는 멈추지 않고 제 길을 계속 간다. 이내 세 번째가 합류한다. 모두가 같은 문장을 시간차를 두고 말하는 대화 같은데, 한 번 굴러가기 시작한 리듬은 끝까지 멈추는 법이 없다. 바닥의 낮은 선율은 쉬지 않고 걸어 다니고, 그 위에서 음들이 촘촘하게 굴러간다. 더 놀라운 것은 첼로나 바이올린 한 대만으로 연주할 때다. 선은 하나뿐인데 음이 위아래를 재빠르게 오가며, 여러 목소리가 함께 울리는 듯한 화음을 귀에 그려 넣는다. 감정을 겉으로 터뜨리는 대신 구조를 쌓아 그 안에서 차오르게 하는 것, 그것이 그의 문법이다.
처음 듣는다면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의 프렐류드부터 열면 좋다. 활로 그은 단 하나의 선이 어떻게 스스로 화음이 되어 방을 채우는지, 그의 세계로 드는 가장 친절한 문이다. 다음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잠 못 드는 백작을 위해 썼다고 전해지지만 근거는 분명치 않은데, 맨 앞의 조용한 아리아가 남긴 뼈대 위로 서른 개의 변주가 쌓였다가 끝에 이르러 처음의 그 아리아가 그대로 되돌아온다 — 얼마나 멀리 갔다가 제자리로 오는지를 따라가 보라. 마지막은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의 샤콘느다. 바이올린 한 대가 오르간처럼 울리는 이 긴 곡은 슬픔을 통곡이 아니라 끝없이 변형되는 설계로 버텨내는데, 앞의 두 곡을 지나온 귀라면 그 버팀의 정체를 알아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