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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홀 한가운데 앉아 있으면 소리가 머리 뒤에서 왼쪽으로, 다시 천장 위로 원을 그리며 지나간다. 소년의 맑은 목소리가 한 음절을 내뱉는 순간 그 목소리는 잘게 부서져 순수한 음의 입자로 흩어지고, 어디까지가 사람이고 어디부터가 기계인지 귀는 끝내 경계를 찾지 못한다. 슈토크하우젠의 소리는 늘 두 가지를 한꺼번에 묻는다. 이것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지금 그것은 공간의 어느 자리에서 울리고 있는가. 그에게 음악은 선율이 흘러가는 시간이기 이전에, 청중을 에워싼 부피이자 만질 듯한 물질이었다.
열여섯 무렵 그는 야전병원의 들것 운반병으로 인 폭탄에 타버린 몸들을 날랐다. 정신병원에 수용돼 있던 어머니는 나치의 이른바 안락사 계획 아래 하다마르에서 목숨을 잃었고, 서류에는 백혈병이라 적혔다고 전해진다. 폐허에서 출발한 전후 세대가 열두 음을 새로 배열하며 음악을 영점에서 다시 세우려 할 때, 그는 음 자체를 의심하고 한 걸음 더 밑으로 내려갔다. 음이 아니라 음을 이루는 가장 작은 입자, 하나의 사인파에서부터 소리를 쌓아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문법은 세 가지 발견 위에 서 있다. 첫째, 리듬과 음높이는 같은 현상의 다른 속도라는 것이다. 규칙적인 맥박을 점점 빠르게 하면 어느 순간 그것은 하나의 음으로 들리기 시작하는데, 콘탁테는 바로 이 경계를 소리가 미끄러지듯 넘어가는 장면을 들려준다. 둘째, 공간은 장식이 아니라 작곡의 재료라는 것이다. 그루펜에서 세 대의 오케스트라는 청중을 삼면에서 둘러싼 채 저마다 다른 지휘자와 다른 빠르기로 연주하고, 소리 덩어리는 홀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다닌다. 셋째, 시간은 절정을 향해 오르는 언덕이 아니라 저마다 완결된 순간들의 연쇄라는 것이다. 시작도 끝도 특권을 갖지 않고, 어느 대목에서 들어와도 그 자리가 곧 중심이 된다.
처음 들을 곡은 젊은이들의 노래다. 소년의 목소리와 전자음이 한 몸으로 녹아드는 열세 분 남짓 동안, 사람의 소리가 물질로 변하는 순간을 먼저 귀에 새겨두면 좋다. 이어서 콘탁테로 넘어가되 전자음에 피아노와 타악기가 더해진 판본을 고르길 권한다. 데이비드 튜더와 크리스토프 카스켈이 남긴 1960년 녹음에서는 살아 있는 타악기가 테이프 속 소리와 서로를 부르고 답한다. 마지막은 슈티뭉이다. 여섯 목소리가 하나의 화음 위에 한 시간 넘게 머무는 이 곡은 앞서 말한 순간의 시간을 몸으로 겪게 한다. 폴 힐리어가 이끄는 시어터 오브 보이시스의 녹음이 믿을 만하다. 여기까지 왔다면, 네 대의 헬리콥터에 나눠 탄 현악사중주가 상공에서 연주하는 리히트 연작의 한 장면이 왜 한낱 기행이 아니라 공간이라는 평생의 화두가 다다른 끝자락인지 어렴풋이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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