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EVAL
중세800–1400
서양음악사가 '중세'라 부르는 육백 년은 소리가 아니라 기록에서 시작한다. 노래야 그 전에도 넘쳤지만, 800년 무렵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왕국이 제국 전체의 전례를 로마식으로 통일하려 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지역마다 제각각이던 성가를 하나로 묶으려면 기억 너머의 도구, 곧 악보가 필요했고, 9세기 장크트갈렌과 메스의 수도원 필사실에서 가사 위에 얹힌 갈고리 모양의 네우마가 태어났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비둘기 모습의 성령에게서 선율을 받아 적었다는 전설 덕에 '그레고리오 성가'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로는 로마 성가와 갈리아 성가가 카롤링거의 용광로에서 융합된 결과였다. 그로브 사전이 굳이 800년경을 시대의 기점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음악이 처음으로 시간을 건너 전달되는 '텍스트'가 된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 음악의 집은 궁정도 극장도 아닌 수도원과 대성당이었다. 장크트갈렌의 수도사 노트커 발불루스는 알렐루야의 긴 멜리스마에 가사를 붙이는 세퀜치아를 모아 『리베르 힘노룸』으로 정리했고, 9세기 말의 이론서 『무지카 엔키리아디스』는 성가에 평행 성부를 겹치는 오르가눔을 처음 문서로 남겼다. 결정적 도약은 1000년대 초 이탈리아에서 왔다. 아레초의 수도사 귀도가 네 줄 보표와 우트-레-미 계이름을 고안하자, 스승의 입에 매달려 십 년 걸리던 성가 학습이 몇 달로 줄었다고 그 자신이 자랑했다. 악보가 정확해질수록 음악은 대담해질 수 있었다. 라인 강변에서는 수녀원장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 환시에서 받았다는 드넓은 음역의 선율로, 최초의 음악극이라 불러도 좋을 «오르도 비르투툼»(1151년 무렵)을 남겼다.
다성음악이 건축의 규모를 얻은 곳은 파리였다. 1163년 무렵 착공된 노트르담 대성당 주변으로 대학이 서고 학생과 성직자가 몰려들던 이 도시에서, 레오냉은 일 년치 전례를 위한 2성부 오르가눔 모음집 『마그누스 리베르 오르가니』를 엮었다. 뒤를 이은 페로탱은 성부를 셋, 넷으로 늘렸다. 1198년 성탄절에 울린 4성부 «비데룬트 옴네스»는 테노르가 성가 선율을 거대한 주춧돌처럼 길게 끌면 그 위에서 세 성부가 리듬 모드의 규칙적 패턴으로 회전하는, 고딕 성당의 음향적 등가물이었다. 두 사람의 이름조차 한 세기 가까이 뒤 파리에서 공부한 익명의 영국 학생이 남긴 필기 덕에 전해진다는 사실은, 작곡가라는 존재가 이제 막 익명의 어둠에서 걸어 나오던 시대의 풍경을 그대로 보여 준다.
교회 바깥에서는 라틴어 아닌 속어로 사랑을 노래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12세기 남프랑스 오크어권의 트루바두르들, 곧 신랄한 도덕가 마르카브뤼, '종달새의 노래'의 베르나르 드 방타도른, 그리고 «아 샹타르» 한 곡으로 여성 트루바두르의 선율을 유일하게 남긴 디아 백작부인은 궁정식 사랑이라는 새로운 감정의 문법을 만들었다. 13세기 초 알비 십자군이 남부 궁정들을 휩쓸자 이 문화는 북쪽으로 옮겨 가 트루베르가 되었고, 나바라의 왕 티보 드 샹파뉴 같은 대귀족부터 아라스의 시민 아당 드 라 알까지 신분의 사다리를 오르내렸다. 아당의 «로뱅과 마리옹의 극»은 노래와 연극을 엮어 훗날의 오페라 코미크를 예감케 한다. 같은 물결이 독일에서는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의 미네장으로, 카스티야에서는 알폰소 10세가 편찬한 420곡의 «칸티가스 데 산타 마리아»로 번져 갔다.
14세기가 열리자 파리의 지식인들은 리듬의 문법 자체를 다시 썼다. 풍자시 『로망 드 포벨』(1310년대)에 실린 실험적 모테트들을 지나, 1322년 무렵 필리프 드 비트리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논서가 이 새 기법에 '아르스 노바', 새로운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음표를 둘로도 나눌 수 있게 되면서 리듬은 산문의 자유를 얻었고, 테노르에 리듬 패턴을 주기적으로 반복시키는 아이소리듬은 대형 모테트의 골격이 되었다. 아비뇽의 교황 요한 22세가 1324–25년 칙서 «독타 상크토룸 파트룸»에서 잘게 쪼개진 음표들이 신심을 어지럽힌다고 질타했을 만큼 새 음악의 기세는 거셌다. 그 완성자가 랭스 대성당의 참사회원이자 당대 최고 시인이던 기욤 드 마쇼다. 1360년대의 «노트르담 미사»에서 그는 미사 통상문 전체를 한 사람의 설계로 통일했는데, 작곡가 개인이 대규모 형식을 책임진다는 이 발상이야말로 이후 육백 년 서양음악의 전제가 된다. 알프스 남쪽에서는 같은 세기에 트레첸토 음악이 꽃펴, 피렌체의 맹인 오르가니스트 프란체스코 란디니가 달콤한 발라타로 도시의 사랑을 받았다.
세기말이 되자 아르스 노바의 정교함은 스스로를 소진하기 시작했다. 아비뇽 주변 궁정의 이른바 아르스 숩틸리오르 작곡가들은 리듬 기보의 곡예를 극한까지 몰고 갔고, 솔라주의 «푸뫼 퓜» 같은 곡은 나른한 반음계로 거의 현대적인 낯섦을 풍긴다. 하트 모양으로 그려 낸 악보가 말해 주듯 음악은 소수 감식가의 유희가 되어 갔다. 균열은 바로 그 지점에서 벌어졌다. 리에주 출신으로 파도바에 정착한 요하네스 치코니아가 프랑스의 구조와 이탈리아의 선율미를 한 몸에 융합했고, 1400년 무렵부터는 영국에서 건너온 3도와 6도의 감미로운 울림, 훗날 '콘테낭스 앙글루아즈'라 불린 그 소리가 대륙의 귀를 바꿔 놓았다. 던스터블과 뒤파이가 그 울림을 이어받았을 때, 육백 년간 성가 위에 쌓아 올린 중세의 건축은 조용히 르네상스의 화성 속으로 녹아들었다.
첫 감상
중세 육백 년을 귀로 여행하려면 세 정거장이면 족하다. 먼저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세퀜치아 «오 비르가 악 디아데마»(앙상블 세퀜치아의 녹음)로 단선율 성가가 품은 황홀을 맛보고, 이어 페로탱의 «비데룬트 옴네스»(힐리어드 앙상블)에서 네 성부가 돌기둥처럼 쌓여 올라가는 초기 다성음악의 위용을 확인한 뒤, 기욤 드 마쇼의 «노트르담 미사»(앙상블 오르가눔 또는 그랭들라부아)로 중세가 도달한 구조적 정점을 만나면 된다. 셋을 순서대로 들으면 기보의 탄생에서 작곡가의 탄생까지, 이 시대가 걸어간 길이 한 시간 남짓에 압축된다.
경계에 관하여 — 시작을 그레고리오 성가 성립(6~9세기) 어디로 잡을지 유동적 — Grove는 기보 전통이 시작되는 800년경을 기점으로 삼음